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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읍성에 대해: 개요와 전국의 읍성

by 여만창 2015. 10. 14.

  읍성. 마을, 고을을 뜻하는 읍(邑)와 성벽, 방벽을 뜻하는 성(城)이 만나서 이루어진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옛날 우리나라에서 지방 군현의 마을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성들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고을들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지역의 중심지 노릇을 했으며, 관아과 객사 등도 읍성 안에 있었다. 산에 위치하여 외적이 침입했을 때 싸울 목적으로 세워진 산성이 군사적인 목적만으로 세워졌다면 사람들이 주로 많이 사는 평지에 세워진 읍성은 평상시의 삶을 같이 하며 행정적인 역할도 수행한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성도 큰 범주에서 보면 읍성에 속한다. 혹자는 읍성 안에 종묘와 사직이 있는 것이 도성이라고도 말하기도 하니 말이다.


  언제부터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오랜 옛날부터 성은 있어왔다. 삼국시대에도 큰 도시들에는 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왕성인 반월성이 있었고, 유사시 방어를 위해 그 주변에 명활산성, 남산성 등의 산성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평지의 읍성에서 생활하다 전쟁이 나면 산성에 올라가 싸우던 전략은 이때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한양도성 주변에 북한산성, 남한산성이 있는 것도 이러한 '평시-읍성, 전시-산성' 전략이 이어져 내려온 흔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 읍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는 고려 때 토성으로 쌓았던 기존의 성들을 석축으로 바꿔쌓고 규모도 조정하는 등 큰 폭의 정비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치, 옹성, 해자 등 방어시설들이 더해지기도 했다. 물론 신축도 활발했다.


  이렇듯 조선 들어 읍성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왜구들의 노략질로 몸살을 앓았던 남해안, 서해안에는 대부분의 고을에 읍성이 있었다고 하며, 내륙에도 큰 도시들에는 읍성이 있었다. 성종 때에는 330여개의 행정구역 중 190여개가 읍성이 있는 고을이었다고 하며, 이후 지속적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이 수백개의 읍성들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읍성들은 불과 수십개에 불과하며, 온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성은 열 손가락으로 세기도 힘들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작은 1910년에 있었던 읍성철거령이다. 대한제국을 강제합방한 일제는 조선총독부 1호 법률로 '조선 읍성 훼철령'을 내린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읍성 철거인 것이다. 명목은 도시계획 및 근대화를 위한 철거였지만 실상은 조선의 군사방어력을 크게 낮추고 전통적인 촌락 형태를 파괴하여 조선의 전통문화를 훼손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십수년에 걸쳐 수많은 읍성들이 헐려서 사라졌다. 그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되고, 광복 후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더 많은 성들이 사라져갔다.


  그 결과, 한국의 읍성은 우리 곁에 살아있지 못하고 과거의 유물이 되어 사라졌다. 지금은 몇몇 지역에만 남아있을 뿐 나머지 지역에선 흔적조차 사라졌거나 몇십 미터의 돌벽만 남아있을 뿐이다. 지나가고 사라진 것에 미련이 남고 관심이 가는 것도 사람 마음! 그래서 한번 전국에 남아있는 읍성을 조사하여 이 자리에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북한 지역에 남아있는 것도 포함이며, 수백개를 모두 일일이 소개할 순 없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읍성과 규모가 컸던 읍성.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읍성 위주로 써보고자 한다. 읍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대원사에서 출판한 허경진 저의 <한국의 읍성>이라는 책이나 '팬저의 국방여행'(http://panzercho.egloos.com)이라는 블로그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이 블로그는 정말 상세하고 전문적으로 읍성을 다루고 있으며,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탐사기들과 직접 찍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다. 여기 아래에 우리나라의 읍성들이 있다. 참고로 한양도성도 여기 포함되어 있으며, 지역 구분은 조선팔도 기준이다.


 

1. 서울/경기도

 

 

* 한양도성


남문인 숭례문


동문인 흥인지문


북악산에 남아있는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며 서울에 도읍하면서 1396년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세종,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 공사를 거쳤다. 평지와 산에 걸친 성인데,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남대문인 숭례문, 동대문인 흥인지문, 서대문인 돈의문,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으며, 서소문인 소의문, 북소문인 창의문(자하문), 동소문인 혜화문,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광희문이 있었다. '남소문'이란 이름의 작은 문이 장충동-한남동 사이 고개에 있었으나 조선 초에 잠깐 쓰이다 사라졌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평지 구간 성벽 대부분과 돈의문, 소의문이 사라졌으며,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남아있던 성벽들도 훼손되어 일부 구간에서는 주택의 축대로 쓰이기도 했다. 70년대부터 서서히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는 70% 정도가 남아있는 상태이며, 서울특별시에서 보존 및 관리, 복원에 많은 공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서울이 가지고 있는 600년 역사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 수원화성

 

화성의 북문, 장안문의 야경

 (사진출처: http://hanafubuki.tistory.com/43)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사적 제3호. 현재 온전히 남아있는 대표적인 읍성이자 수원의 상징이다. 짧게 '화성'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읍성이긴 하나 수원읍성이라고는 잘 불리지 않는다. 본래 지금의 화성시에 '수원고읍성'이라는 이름의, 고려 때부터 사용되던 성이 있었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며 새롭게 성을 쌓아 1796년에 완공되었다. 정조는 이곳으로의 천도를 고려할 만큼 공을 들였으며, 화성의 탄생으로 기존 수원읍성은 버려지고 수원화성 일대가 지금의 수원시의 중심지가 된다. 당대 최고의 기술로 쌓았으며, 조선의 축성술을 총동원하였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이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렇듯 당시의 신기술을 활용한 점과 봉수대, 치, 옹성 등 그때 동안 볼 수 있었던 방어, 군사 시설들이 집대성된 점 때문에 조선을 대표하는 성이자 근대적인 성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지만 이후 꼼꼼한 복원으로 원형을 대부분 회복한다. 그리고 그 가치와 보존상태를 인정받아 1997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지정되었다. 조선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성이며, 이런 성이 무사히 남아있는 것은 참 감사할 만한 일이다.

 

* 개성 성곽

 

 내성의 남문인 남대문

 

 

  북한 국보유적 129호(궁성), 130호(내성과 나성). 500년 고려왕조의 도읍지였던 개성에 남아있는 성이다. 도성이라는 점과 산(한양은 북한산, 개성은 송악산)을 등지고 있다는 점은 같지만 개성의 성은 내성과 외성, 둘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외성은 '나성'이라고도 불리며, 11세기인 1079년에 완성된 역사깊은 성이다. 그후, 나성이 너무 커서 방비가 힘들다는 점 때문에 고려 말에 내성의 건립이 추진되었고, 조선이 개국된 후(1394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이 내성 안에는 궁성이 또 따로 있었다. 내성에 7개, 나성에 25개나 되는 성문이 있었고, 나성의 둘레도 한양도성보다 5km나 더 긴 23km에 달했으나 현재 제대로 남아있는 성문은 내성의 남문인 남대문 하나다. 남대문의 누각은 한국전쟁 와중에 소실되었으나 1954년에 복구되었고, 성곽, 만월대, 성균관 등 개성의 다른 고려 유적들과 함께 2013년에 '개성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남대문은 현재 개성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 강화산

 

 

 

  사적 제132호. 13세기에 있었던 몽고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고려 조정이 임시로 강화도로 천도해오면서 토성으로 처음 쌓았다. 내성, 중성, 외성의 삼중 구조로 쌓았으며, 23km에 걸쳐 쌓았다고 하며 그중 내성이 1.2km다. 40년 가까운 대몽항쟁기 동안 고려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으나, 결국에는 고려 조정이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개성으로 돌아가면서 몽고의 강압에 의해 성은 헐린다. 그후 조선 때 내성 자리에 석축으로 성을 다시 쌓았고, 이것이 '강화읍성'으로도 불리는 오늘의 강화산성이다. 조선 말에는 강화 해안가의 여러 포대 및 산성들과 함께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요새 역할도 했다.

 

* 교동읍성

 

 

  인천광역시 기념물 23호. 교동도에 있는 작은 읍성이다. 1629년에 경기수영이 교동도에 들어서면서 쌓았다고 한다. 교동도는 고려 및 조선 때 수도와 가까우면서도 육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유배지로 쓰이기도 했는데, 고려 희종과 조선 연산군이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지금도 읍성 안에는 연산군적거지가 있다. 3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남문 뿐이며, 그나마도 일제강점기 때 폭풍에 의해 망루가 무너져 홍예만 남아있다.

 

  이외에도 안산, 안성 등 경기도 곳곳에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강원도

 

 

* 강릉읍성

 

강릉 시내에 남아있는 강릉읍성 유적


  왜구의 침입이 있었던 고려 말부터 강릉부 관아를 둘러싸는 성곽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에 둘러 문 4개를 가진 약 1.1km 둘레의 석성으로 축성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강릉 시내에 일부 흔적만 남아 강릉에 읍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다만 강릉읍성 내부에 있었던 객사, 관아 등은 일부 건물들과 건물터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성내동' 등의 지명은 계속 쓰이고 있다.

 

  이외에도 양양, 고성, 통천 등에 읍성을 쌓았다는 옛 기록이 남아있으며, 원주에도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충청도

 

 

* 해미읍성

 

해미읍성 문화축제가 열리는 모습

 

  사적 제116호. 충청남도 서산시에 있는 읍성으로, 1914년에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기 전까지 이 지역의 중심지였다. 행정적인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는데, 조선 때에는 충청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머무르기도 했다. 조선 말에는 3천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한 역사가 있어서 천주교의 성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읍성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인 읍성으로 빠짐없이 꼽힌다. 최근에는 해미읍성 문화축제가 열리는 등 서산시의 중요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 공산성

 

 

  사적 제12호. 백제시대에 처음 생긴 유서깊은 고대 성곽으로, 웅진백제의 도읍이었던 곳이다. 원래 토성이었으나 조선 때 석성으로 개축되어 조선 성곽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공주는 조선 때만 해도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충청도의 중심지였으며, 공산성은 그 공주를 지켜주는 방벽 역할을 해주었다. 2015년엔 공주, 부여 지역의 다른 백제 유적들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비록 산성이기는 하나 조선의 주요 성읍이었던 공주를 대표하는 성곽이라는 점과 전형적인 조선 읍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 글에서 소개했다.

 

* 홍주읍성

 

 동문 조양문

 

최근 복원된 남문 흥화문

 

  사적 제231호. 충남 홍성군에 소재하며, 홍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 세종, 문종 때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지게 된다. 약 1.7km 둘레의 성이었으나 현재는 800m만 남아있으며, 성문으로는 1975년에 문루를 복원한 동문의 조양문만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2013년에 남문인 흥화문이 복원되어 현재는 2개의 성문이 존재한다.

 

* 청주읍성

 

 

 청주읍성의 옛 성문

 

최근 복원된 청주읍성 성곽

 

  청주에 있었던 읍성이다. 조선 성종 때인 1487년에 약 1.8km 둘레의 규모로 세워졌으며, 효종 때부터 해미에서 옮겨온 충청병마절도사가 머무르던 충청도의 군사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읍성은 1911년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역사회에서는 도시 역사성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읍성에 관심을 가지고 복원을 추진해왔고, 그 결과 2013년에 서쪽 35m 구간을 복원했다. 실제로 청주읍성이 있었던 자리이며, 복원을 위해 800여개의 실제 성돌을 찾고 많은 전문가와 장인들의 고증을 거쳤다. 비록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지역사회와 청주시의 관심 덕분에 사라진 읍성으로는 존재감이 높다.

 

  이외에 충청도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10호인 남포읍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13호인 비인읍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32호의 서천읍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134호의 한산읍성 등이 남아있으며, 보령읍성은 주포초등학교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남문인 해산루와 일부 성벽 유적이 남아있다. 충주에도 읍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4. 전라도/제주도

 


* 낙안읍성



  사적 제302호. 전남 순천에 소재한다. 조선 태조 때 왜구의 침입에 대항해 토성으로 세워졌으며, 세종 때 석축으로 개축되었다. 지금은 시골이지만 1908년까지만 해도 '낙안군'이라는 군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낙안군의 벌교 지역이 보성으로, 나머지 지역들이 순천으로 통폐합되면서 중심지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덕분에 개발과 도시화에서 빗겨가 읍성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읍성으로, 성뿐만 아니라 성 안의 마을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여느 민속촌과는 다르게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렇듯 조선 성읍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으며, 여러 축제들도 열리면서 지역 명소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 고창읍성


사진출처: http://www.cnk-fs.com/?document_srl=4661&mid=explore_gall&sort_index=regdate&order_type=asc


  사적 제145호. 모양성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둘러 1.6km의 석성으로, 정확한 내역을 알 수 없으나 단종 때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성으로, 낙안읍성, 해미읍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두 읍성과는 다르게 구릉지에 지어져있으며, 성 안에는 관아 및 기타 건물들만 있을 뿐 마을은 없다. 성 안의 관아 건물들은 불타 사라졌다가 70년대부터 복원해오는 중이다. 성밟기를 하는 성으로도 유명한데, 돌을 이고 성을 돌면 무병장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전주성


남문인 풍남문


  전주부성이라고도 불린다. 지금도 전라북도의 중심지인 전주는 예로부터 전라도의 중심지였으며, 조선 때는 전라감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전주에는 오랜 옛날부터 성곽이 존재해왔다.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 파괴되었다가 영조 때 재건되었다. 그러나 훼철령이 내리기도 전인 1907년에 도시계획에 의해 남문인 풍남문을 제외한 모든 문과 성곽들은 철거된다. 풍남문은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70년대의 복원을 통해 제 모습을 찾았다. 전주성은 동학농민군이 거쳐간 성이기도 하며, 전라도의 중심지라는 상징성 때문에 농민군과 관군 모두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 나주읍성


남문인 남고문


동문인 동점문


  사적 제337호. 지금과 달리 나주는 구한말까지만 해도 큰 도시였으며, 전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군사적인 요충지이기도 했으며,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견훤을 등뒤에서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땅이기도 했다. 동학운동 때에도 전투가 벌여졌으나 결국은 관군이 수성에 성공한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고려시대부터 읍성이 존재했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조선 때 수차례 개축되었다. 4개의 성문과 900여m의 성벽을 지닌 성이었으나 1910년도에 대부분 헐렸고 최후까지 남아있던 남문도 1916년과 1920년 사이에 철거된다. 그러나 읍성 복원에 대한 나주시의 강력한 의지에 힘입어 1993년 남문인 남고문이 복원되었고, 동문인 동점문도 복원되었다. 장기적으로는 서문과 북문도 복원이 완료될 계획이다.


* 남원읍성



  사적 제298호. 남원성이라고도 불린다. 네모반듯하게 지어진 석성으로, 조선 숙종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동서남북에 4개의 문이 있었지만 동문과 남문은 동학농민운동 와중에, 서문과 북문은 일제강점기에 헐려 없어졌다. 특히 북문 주변에 남원역이 생기면서 훼손이 심했다.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남원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 제주읍성


사진출처: http://storyjeju.tistory.com


  제주도 민속자료 1호. 제주성이라고도 불린다. 제주에는 탐라시대 때부터 성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 옛 문헌들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고려 때에는 제주성이 확실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3개의 문을 갖추고 있었으며, 조선 때에 산지천 너머로 확장하여 개축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항만 개발에 성곽의 돌들이 쓰이면서 대부분 훼철되고 현재는 150m 구간만 잔존 및 복원되어 있다.


  이외에도 전라도에는 전라남도 기념물 233호인 강진읍성,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43호인 진도읍성, 제주도에는 제주도 기념물 12호인 대정읍성, 제주 유형문화재 5호인 성읍성 등이 남아있다.



5. 경상도



* 진주성



  사적 제118호. 백제 때 토성으로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 우왕 때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그 뒤, 조선 선조 때에 외성이 추가되었는데, 내성은 둘레가 1.7km, 외성이 4km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 때에는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에 주둔하였꼬, 임진왜란 때에는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논개의 투신이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구한말이 되고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진주성은 부패한 지방 관리와 일제의 훼손으로 인해 촉석루만을 남기고 진주성은 사라지다시피 한다. 다행히 70년대에 복원이 이루면서 촉석루를 중심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 경주읍성



  사적 제96호. 경주에는 신라시대부터 성읍이 있어왔으나 현재 남아있는 경주읍성은 고려 말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신무기인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성을 탈환한 경주성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경주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읍성은 대부분 헐려 현재는 경주역 근처 동쪽 성벽 50m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은 예전에 남문인 징례문에 걸려서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 동래읍성


북문과 성벽


인생문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지금의 동래는 부산광역시의 일부지만 조선시대에는 동래부로서 부산과는 별개의 고장이었다. 동래성은 일본과의 교류 때문에 외교적으로 중요한 곳 취급을 받았다. 임진왜란의 두번째 전투인 동래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며, 송상현이 이곳에서 항전하다가 군민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18세기에 훨씬 큰 규모로 증축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동래읍성은 이때 증축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와 도시화를 거치며 평지의 성곽과 성문은 사라졌으나 북문과 인생문 등이 복원되었고, 현재는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적지이다. 그러나 인생문 등 일부 구간의 복원은 엉터리이고 부실하다는 지적을 수도 없이 받고 있는데, 인생문은 성벽이 붕괴되는 사고까지 벌어졌다.


* 대구읍성


남문 영남제일관


  영남의 대표적인 대도시인 대구광역시 한복판에 있었던 읍성이다. 조선 선조 때 왜의 침입에 대비해 토성으로 세워졌으나 왜란 와중에 파괴된다. 1736년에 석성으로 개축이 이루어졌으며, 2.7km 둘레에 6개의 성문과 4개의 망루를 갖추었다. 경상감영도 대구읍성 안에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성벽을 골칫거리로 여겨왔던 일본인들에 의해 부분적인 훼손이 이루어졌고, 급기야는 그들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 박중양에 의해 철거되어 버린다. 조정에서 불허 명령을 내렸음에도 기습적으로, 불법적으로 사라진 대구읍성이 있던 자리는 도로로 전용되었고, 북성로, 동성로 등의 도로가 셩벽 자리에 생겨난다. 1980년에 망우공원에 원래보다 큰 규모로 복원된 남문 영남제일관을 제외하곤 남아있는 게 없으나 대구광역시에는 대구읍성 상징거리를 조성하는 등 지속적으로 읍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2022년까지 400억원을 투입해 읍성을 복원한다는 장기계획도 세워두었다.


* 거제읍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46호. '고현성'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세종 때부터 거제현의 관아가 있는 곳이었으나 현종 때 관아가 이전하면서 성은 기능을 잃는다. 성벽은 잘 보존되어 왔으나 한국전쟁 때 포로수용소가 거제에 생기면서 일부가 헐려 지금까지 전한다.


  이외에도 경상도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았던 읍성들이 많다. 경상남도 기념물 144호인 사천읍성, 경상남도 기념물 15호인 웅천읍성, 경상북도 기념물 103호인 청도읍성, 사적 386호인 장기읍성, 사적 153호인 언양읍성 등이 있다. 언양읍성은 복원 얘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김해읍성은 북문이 복원되었고, 청도읍성도 일부가 복원되었다. 이외에도 창원, 상주에도 읍성이 있었으며, 상주읍성은 복원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7. 평안도



* 평양성


대동문


보통문


칠성문


  북한의 주요한 유적으로 남아있는 평양의 성이다. 평양은 고조선 때부터 도읍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 깊은 고도로, 평양성은 고구려시대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진 삼중구조에 약 15개의 성벽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산과 강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보통강과 대동강이 성 주변을 해자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요새화된 구조 덕에 평양성의 방어력은 상당했다. 고구려가 망하자 옛 영화를 잃었다가 고려시대에 '서경'으로 불리며 다시 중요한 요충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고려 태조 때부터 추진해오던 북진정책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한때 천도설도 나왔으나 묘청의 난이 진압되면서 수포로 돌아가기도 했다. 조선 때도 여전히 북부지방의 중심성읍으로서 기능했으며, 평안감사도 평양성에 머물렀다. 또한 15세기 들어 평양의 성곽도 재정비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성문들도 모두 이 시기에 개축된 것들이다. 그후 한국전쟁 때 평양이 집중포격을 받으면서 평양성도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 북한이 복구하여 오늘에 이른다. 내성의 동문인 대동문이 북한 국보 4호, 중성 북쪽의 보통문이 북한 국보 2호, 내성의 북문인 칠성문이 북한 국보 1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평양의 명승고적으로 유명한 을밀대(북한 국보 19호)도 평양성의 북쪽 장대였다.


* 안주읍성


백상루와 성벽


북문인 현무문


  청천강가에 자리잡은 안주는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요충지이자 평안도의 대표 고을이었다. 평안도의 '안'도 안주의 '안'이 아니던가. 고려 때 거란에 맞서 북방 영토를 넓히던 시기에 '안북부'로 불리던 안주는 조선 때에도 군사요충지도 여겨져 평안병영이 있었다. 실제로 정묘호란 때 이곳에서 안주성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개축된 것이며, 읍성의 규모가 점점 커져 삼중성곽으로까지 커지기도 했다. 성의 누각이었던 백상루가 원래 위치에서 수백미터 옆으로 옮겨져 이전 복원되어 있다. 백상루는 북한 국보 제31호이기도 하다.


* 정주읍성



  5세기부터 있던 오래된 토성을 1714년에 석성으로 개축한 성이다. 당시에는 둘레가 4.1km에 달했다고 한다. 홍경래의 난 때 벌어진 정주성 전투가 아주 유명하며, 반란군은 약 4개월 동안 여기서 최후까지 항전하다 결국 성벽이 폭파되면서 성은 함락되고 난은 종결된다.


* 의주읍성


의주남문


  북한 보존급 제153호. 압록강과 맞닿은 의주에는 고구려 때부터 성이 있었으며, 고려 때에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조선조 들어 1520년대에 대대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때 두 배 가까이 확장되었다. 해동제일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의주성의 남문인 장변루는 '의주남문'이라고 불리며, 북한 보물 10호이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50년대에 복구한 것이며, 의주성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유적이다.


  이외에도 평안도에는 남문이 북한 국보 44호로 지정되어 있는 구주읍성, '철옹성'이라는 말의 기원이된 영변읍성, 강계읍성 및 벽동읍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8. 황해도



* 해주읍성



  황해남도의 도청 소재지인 해주는 조선시대에도 황해도의 중심지였다. 황해감영이 해주에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읍성도 있었다. 고려 공양왕 때 처음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해주읍성은 이후 조선시대에 수차례 개축을 반복하였다. 凸 모양의 해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구가 황해도 지역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이외에도 해주와 함께 황해도의 중심 도시였던 황주에도 읍성이 있었고, 풍천읍성, 연안읍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9. 함경도


* 경성읍성


경성읍성 남문



  북한 국보 제118호. 고려가 북방영토를 개척하며 1107년에 토성을 처음 쌓았고, 지금의 성벽은 1622년에 다시 쌓아 2.2km 둘레로 완성한 것이다. 국경수비에서 중요한 성으로 인식되었고, 경성은 근대까지도 함경남도의 도청이 있었을 정도로 함경도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성문은 4개가 있었으나 현재는 남문만 남아있다.


* 함흥읍성


함흥읍성 남문


구천각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함경도의 중심도시인 함흥에는 그 격식에 걸맞는 커다란 읍성이 있었다. 함흥감영도 함흥성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은 사라졌고, 현재는 성의 북장대인 구천각만 남아서 전한다. 구천각은 북한 국보 108호이다.


  이외에도 함경도에는 길주읍성, 종성읍성, 갑산읍성 등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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