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우리는 새로운 제품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신제품들의 수많큼 많은 수의 물건들이 구형이 되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다.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구형은 나날이 그 숫자가 줄어만 가고, 사람들도 신형의 우수함과 편리함, 신선함에 빠져 구형을 잊어간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좋은 물건이었다'라고 기억되는 물건들이 있다. 나는 아이폰4를 거의 5년 썼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괜찮은 물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도 사용자들에게 인정받는 물건이 명품이란 게 아닐까.
쌍용 무쏘도 바로 그런 물건이다. 1993년에 처음 나온 무쏘는 한창 팔릴 당시에도 인기 차종이었다. 하지만 2005년에 단종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무쏘를 부활시키라는 소리는 잊혀질 만하면 나온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진짜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코란도와 함께 쌍용의 명차, 시대의 명차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차다.
그런데 그런 무쏘를 직접 운전해볼 기회가 생겼다. 친구 중 하나가 아버지로부터 무쏘를 물려받아 끌고 있었는데,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면서 운전대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친구의 무쏘는 이 글 맨 위에 있는 사진과 똑같이 생긴 흰색 차였다. 정확한 연식은 어디 써있는 데도 없고 친구도 몰라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선바이저에 '대우 무쏘'라고 써있던 점과 2002년식까지 적용됐던 그릴이 붙어있던 걸 보면 2001년식으로 추정된다.
트림은 230S. 2.3L 터보 디젤 엔진(101마력, 21kg.m)에 비트라제 4단 자동변속기가 맞물렸고, 네바퀴굴림이었다. 시승 당시 주행거리는 무려 26만km였다. 상당히 많이 달렸지만 친구 아버지가 애정을 갖고 꾸준히 관리를 해줬다고 한다. 실내는 내비게이션을 달고 멀티잭을 설치한 걸 빼면 순정상태 그대로였다. 덕분에 카세트플레이어도 오랜만에 만질 수 있었다. 큰 덩치과 각진 외모에 걸맞게 트렁크도 광활했다. 말 그대로 광활했다. 7인승 모델이었지만 3열을 접어 그 공간을 모두 짐칸으로 쓰고 있었다. 공간이 넉넉해서 헤드룸, 레그룸 이런 건 가늠해볼 필요도 없었다. 뒷좌석은 등받이 각도 조절이 가능한 리클라이닝 시트라서 편히 기대 갈 수 있었다.
편의장비는 10년도 훨씬 된 차인데다 당시 무쏘에서도 상위트림은 아니었기 때문에 요즘 차에 비할 게 못된다. 그때 당시에는 괜찮은 옵션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경차에도 다 달리는 것도 많기 때문에 편의장비 얘기는 이런 오래된 차에는 할 게 아니다. 애프터마켓 장비로 하이패스, 리모컨키, 원격시동 장치가 달려있었다. 사륜구동이기 때문에 사륜 전환 스위치도 센터페시아에 있었는데, 2H, 4L, 4H로 구성되어 있었다. 변속기는 윈터(W) 모드와 파워(P) 모드를 지원한다.
시동 걸기는 마치 군시절 몰던 군용차를 떠올리게 했다. 디젤 엔진이 달린 군용차들은 추운 겨울날에는 시동을 걸기 전에 예열이 필요하다. 열쇠를 꽂고 키온 상태로 돌리면 마치 돼지코처럼 생긴 플러그 불이 들어오는데, 이 불이 꺼지고 시동을 걸어야 한다. 요즘 나오는 디젤차들은 딱히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바로 시동을 걸지만 이 차는 옛날 차다. 그래서 군대에서 시동 걸던 것처럼 돼지코가 꺼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사실 시승차의 2.3L 터보 디젤은 무쏘의 주력 엔진이 아니었다. 무쏘는 그보다 약 20마력 더 높은 2.9L 엔진이 주력이었다. 거기다가 요즘 기준에선 조금 답답한 4단 자동변속기가 맞물려 있었다. 때문에 기민한 움직임은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도 시내나 저속에선 묵직하면서도 부족함 없는 성능을 발휘했다. 시동 얘기할 때 군용차를 언급했는데, 주행질감도 든든한 게 마치 군용차를 모는 듯한 느낌이었다. 승차감이 별로 안 좋다는 것도 비슷했다. 물론 두돈반 같은 물건과 비교하면 훨씬 낫지만 요즘 승용차보다는 떨어진다. 노면의 잔진동이 모두 느껴진다. 하체는 대체로 믿음직하지만 당연히 고속 코너에서는 살짝 불안하다.
2.3L 엔진이 원래부터 진동과 소음으로 악명이 있었다는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연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진동과 소음은 꽤 있었다. 요즘 디젤차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용달트럭이라고 놀릴 것이다. 고속도로를 시속 100km 정도로 달릴 때 엔진회전수를 거의 3,000rpm 가까이 쓰기 때문에 소음은 더 하다. 또한 높고 각진 차체 때문에 고속 주행 때의 풍절음도 크다.
확실히 고속주행 성능은 부족함이 컸다. 성인 4명을 태우면 120km/h를 넘기 힘들다. 추월 가속도 부족해서 뒤차 눈치가 보였다. 그나마 엑셀을 끝까지 밟으면 터보 디젤의 두툼한 토크로 가속을 앞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고속 성능에 실망까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차에 그런 걸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SUV는 속도를 바라는 차가 아니었고, 주력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2.3L 엔진에 무거운 차체는 속도와 궁합이 좋은 조합이 아니다. 거기다가 이 차는 26만km를 10년 넘게 달린 차다. 그래서 실망은 하지 않았다.
제일 이질적이었던 건 브레이크였다. 잘 듣는 걸 넘어 예민하기까지 한 요즘 세단만 타다가 무쏘를 타니 브레이크가 너무 둔감했다. 군에서 운전교육 받을 때 타던 구형 5톤(K711)이 떠올랐다. 페달을 밟자마자 반응하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 깊숙이 밟아줘야 브레이크가 듣는다. 혹시 앞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이면 제때 감속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안전거리를 충분히 두고, 빨간 불 한참 전부터 속도를 줄이는 식으로 운전했다. 엑셀도 마찬가지다. 밟는다고 바로바로 회전수와 속도가 올라가는 게 아니다. 이건 아마 터보랙과 4단 자동변속기 때문인 듯하다. 자연흡기 엔진이나 터보랙이 거의 없는 요즘 터보엔진을 얹은 차만 탄 사람이라면 답답하겠지만 이 정도는 여유의 미학이라고 좋게 봐줄 만하다.
연비는 정확히 재보지 못했다. 하지만 기름을 꽤 많이 먹는 것 같았다. 2.3L 4WD 공인연비는 9.1km/L다. 그보다 떨어지는 약 7~8km/L 정도인 걸로 추정된다.
이번 무쏘 시승은 아주 기분 좋은 기회였다. 새 차는 여러 가지 시승 기회가 있고 카셰어링이나 렌터카를 이용해서라도 타볼 수 있다. 하지만 단종된 지 한참 된 옛날 차는 지인의 차를 빌려 타는 것 말고는 체험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잡지에 중고차 시승 기사가 실리면 더 재밌게 읽는 것 같다. 다행히 친구를 통해 무쏘의 운전대를 잡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메력이 확실한 차다. 여유롭고 묵직한 맛과 남성미가 넘치는 차다. 지금까지 여러 차를 시승해봤지만 무쏘 시승은 그 중에서도 특히 잊을 수 없는 시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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